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단 편집) == 국내에서 == 국내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는 상류층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6.25 전쟁]]과 [[5.16 군사정변]] 후 군사 독재를 겪는 등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부분 [[흙수저]]에서 시작한 [[계급|특권층]]과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한 [[금수저]]들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책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의견이 나쁜 것을 모두 일제의 탓으로 돌려 면피하는 것이고, 애초에 조선시대 [[유교]] 이념 자체부터 문제라고 보는 시선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유학의 이념은 오히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중국과 조선 등 유교 사회에서 상위 계층을 [[사대부]], 군주의 지향점을 [[군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적어도 원론적으로 이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과 온전한 의미의 양반 사대부들은 [[경연]]과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 및 수양을 통해 자신들이 먼저 유교의 [[사서오경]]을 깨우치고 [[성리학]]적으로 심성을 맑게 닦아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그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할 자격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인과 상민 및 천인들을 대할 때는 지배층으로서 떵떵거리면서 사대부 자신들이 유교 덕목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특히 성리학) 위주 국가 체제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약만 봐도 조선의 지배계층이 얼마나 피지배계층을 의식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 사회를 [[양천제]] 위주로 보는 학자들은 양반 역시 양인이므로 적어도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는 양반들이 양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병역비리나 면제악용 등 기피현상을 보여 비판받는 대한민국의 상류층과는 대조적이게도 당시 조선 고급 관료들의 자제들 중 일부는 특수군의 일반병[* 고위 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한 충순위, 충의위 등 부대가 [[오위]] 내에 편성되어 있었다.]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란기에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거나 환란기 정세에 뛰어드는 이들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양반층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구국의 성웅으로 칭송받는 [[이순신]]도 지체 높은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구한말의 [[최익현]] 등 의병장들 또한 대부분이 이름난 양반 실력가들이었다.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회영]] 가문은 당시 조선의 손 꼽히는 역대급 부잣집이자 [[경주 이씨|명문]]이었으면서도 전재산을 쏟아부어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지었으며, 독립운동을 하다 6형제 중 다섯이 고문사, 객사, 아사했다. 꼭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프랑스 귀족들 같은 막장 사례와 비교하지 않아도, 조선의 지배층은 동시기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가진 편이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한 의식의 기반이 바로 [[유학(학문)|유학]]에서 지향하는 엘리트주의적 모범이기에 "유교적 전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00년간 조선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항상 잘지켰느냐는 전혀 별개의 얘기지만 표면적인 이념의 성격은 그러했다. 영국 귀족의 전쟁 수행과 같은 상무정신을 기반으로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한국사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신라]]가 바로 그것으로, [[삼국사기]] 열전들을 보면 삼국시대 신라 귀족층은 대대적으로 전투에 참여해 수많은 희생을 낳았으며, [[화랑도]]의 임전무퇴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권장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신라 귀족층이 전투에 투신해 죽었다. [[김유신]] 본인 역시도 젊은 시절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자살 돌격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나이가 70에 달한 시기에도 젊은 장수들 대신 고구려 수도 앞까지 접근하는 위험한 작전을 자원해 나서기도 했다. 신라 문화에서 귀족층은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자[* 이마저도 마지막에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였으나 부하 장수들이 말고삐를 빼앗아 쥐며 말린 탓이었다.]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을 참할 것을 청했고 의절했으며, 문무왕이 죄를 면하게 하였으나 끝끝내 용서하지 않아 김유신 사후 매소성 전투에서 김원술이 치욕을 되갚았음에도 김유신의 부인이자 김원술의 어머니 또한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김원술은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귀족층이 병사보다 먼저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라의 특기할 만한 사회 분위기는 역사학자들의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바람직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신라 장군 아들이 황산벌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죽은 사례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만 하다. 그리고 [[이순신|어느 성웅]]께서도 [[명량 해전|모두가 질 것이라고 생각한 바다에서 대장선에 타서 직접 전투하며 적들을 격퇴한 바 있다.]] 사회 상류층이 국란이나 전란이었을 때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http://m.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37|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시에도 고귀한 의무와 덕행을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스스로 실천한 가문은 적지 않았다. [[임술농민봉기]]와 [[동학 농민 운동]] 등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도 이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양반들의 저택들은 농민군이나 심지어 초적들까지도 그들의 덕행을 알았기에 보호했고[* 대표적으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이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시절의 [[김구]]를 보호한 사례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 안태훈은 아들 안중근과 더불어 민병대를 이끌고 동학 농민군과 맞서던 중이었다.] 오늘날까지 몇몇 유서 깊은 [[종갓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현대에도 기득권층 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유일한]]''' 박사, [[김용환(1887)|김용환]], 언급한 [[이회영]], [[전형필]] 처럼 훌륭한 인물도 있고, 최근에야 선행들이 알려진 [[함태호]] 명예회장도 있다. 백범 [[김구]]의 자손들 역시 대대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언급한 [[경주 최씨|최부자집]] 가문의 최준 선생도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며, 광복 후에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 현재의 [[대구대학교]]와 다르다.]을 세워 민족의 교육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서양 중심 또는 현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상과 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한국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므로 성급한 일반화는 삼가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대중 매체가 [[민중사관]]의 영향으로 기득권을 무조건 악으로 상정한 후 역사를 통해 정당화하려했기에 이러한 일반화를 가중 시킨 면이 있다. 물론 과거와 달리 [[헬조선|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대중을 말 잘듣는 가축 취급하는 금수저가 숱하게 존재하는 게 현실인데, 가장 심각했던 사례라면 역시 [[IMF]] 사태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기부된 금붙이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던 대기업 및 재벌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이들조차 결혼반지나 돌반지 등 그야말로 평생 가져가야 할 보물이나 가보들마저 앞장서서 기부했는데, 정작 이 보물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대기업 및 재벌들은 이 기부 물품들을 해외에 저렴하게 팔아버리고 바로 비싸게 구매하는 방식으로 부가세 포탈에 이용했다. 당연하지만 안 그래도 외화가 부족해서 파산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상황을 더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배를 불리는 행위였으며, 까놓고 말해 [[매국노|나라 팔아먹는 짓]]이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그냥 당연히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선인 법적 의무도 대놓고 어기는 것이니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안 지킨 게 아니라 그냥 '''범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